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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역대 최대 행정소송을 승리로 이끈 최승재 법무법인 클라스 변호사

2023-07-17(월)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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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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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퀄컴과의 싸움서 이긴 ‘법조계의 다윗’

최승재 법무법인 클라스 변호사는 부산 용인고와 서울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제법 석사 및 경제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세무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 2000년 사법연수원을 제29기로 수료하고 삼성 SDI 기업변호사로 첫 발을 내디뎠다. 이어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기업변호사, 경북대 로스쿨 교수,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내고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법무법인 다래 등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한국 엔터테인먼트법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국세청 조세법률고문,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자신이 예측하고 준비해온 것들을

현실 공간에서 만났을 때의 쾌감

“아, 내가 맞았구나” 감사가 절로

다음 생은 가톨릭 사제로 살고 싶어

1조300억 원이 넘는 역대 최대의 과징금을 두고 공정거래위원회를 대리해 6년간을 끈 행정소송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변호사라고 했다. 상대는 미국에 본사를 둔 퀄컴이라는 글로벌기업과 그를 대리한 국내 굴지의 대형로펌의 변호인단이었단다. 그래서 법조계 일각에서는 흔한 비유지만 이 소송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를 만나기 전 그가 치밀한 전략가이자 열정적 투쟁가 유형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내 예상은 대화를 시작하고 채 20분이 안 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승재(51·사법연수원 29기) 변호사는 상당히 사변적인 사람이었고, 언술과 표정 같은 표현을 매개하는 개별 단위까지 상대방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겸양이 몸에 밴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승소 판결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는 데서 드러났다.

“공정위 사무관과 대법원에서 가서 판결을 들었는데, 저에겐 이기고 지고의 문제보다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사건의 결과를 보는 게 의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무관은 승소 판결이 나자마자 보도자료 돌려야 한다면서 갑자기 급해지는데, 저는 남들이 알아주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사실 인터뷰를 몇 군데 한 것도 친한 후배 변호사가 그렇게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한 것인데….(웃음)”

사전에 미리 말하면, 이 인터뷰는 퀄컴 사건이 노정한 법리적 이슈나 법제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한 변호사가 그 사건 앞에 당도하기까지의 고유하면서도 징후적인 서사를 전달하는 데 있다. 먼저 그 서사의 첫 줄이 될 성장 배경을 물었다.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반송이라는 동네에서 자랐죠. 당시 ‘도시빈민’들이 모여드는 부산 주변부였어요.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생 신분이어서 아버지는 동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부모님은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셨어요. 제가 ‘문방구집 아들’이었던 거죠. 저는 밑에 동생 둘이 있는 장남이에요. 부모님은 매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해 밤늦게 들어오셨어요. 제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앉은뱅이 책상 하나를 사주신 게 계기가 됐는데요. 어느 날 시장에 가보니까 부모님이 엄청 고생을 하시는 거예요. 어린 나이에 그게 참 애처롭게 보였어요. 부모님이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오셨을 때 제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시면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시골집 장남’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공부를 택한 거예요.”

타고난 수재인데다 적성도 맞고, 거기에 적실한 모티프까지 있었던 최승재 변호사는 ‘공부하는 일’에 매진해 서울대 독어교육과에 입학한다. 원래는 의사가 되면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과를 가려고 했지만, 당시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의 지극히 ‘고전적인’ 설득에 그는 문과로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고1 마칠 즈음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불러서는 우리 학교가 신생학교이고 너는 수석으로 입학했으니 문과를 가는 게 좋겠다고 진지하게 권유하시는 거예요. 의사라는 직업을 희망했던 것도 저의 자발적인 의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말씀을 따라 문과를 갔어요. 그러면서 대학은 법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의 어떤 이념적 이슈에 할아버지가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그는 이 사실을 밝히지 말아주길 바랐는데, 이게 그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라는 생각이 들어 축약해서 넣었다.) 아버지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청천벽력이었어요. 그래도 부전공을 법학으로 했어요. 당시가 혼란스러운 시대였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파고드는 것밖에 없었어요. 전공학점, 계절학기 같은 걸 다 합해서 150학점 넘게 이수하고 7학기만에 조기졸업을 했어요. 당시 중앙도서관이 저에겐 가장 안온한 곳이었어요. 그때 꿈이 중앙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는 거였어요.”

최 변호사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90년. 정부는 규제하고 있던 과외를 풀어준다. 그런데 그가 서울에 올라와 보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 흔한 ‘사돈의 팔촌’조차 없었다고. 그래서 그는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서울에 연고가 있는 다른 친구들이 소개를 받아 고액이 보장되는 과외 자리를 찾아갈 때, 그는 학교 구직센터에 의존해 겨우 일을 구할 수 있었단다. 과외 수입으로 생활비 쓰고 읽고 싶은 책도 사고 나머지 반 정도는 부모님에게 보냈다고 했다.

“그 시절 늘 곤궁했던 기억이 있어요. 선배들에게 넉살 좋게 밥 좀 사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자존심 때문인지 그런 말이 안 나오더라구요. 좀 역설적이지만 그게 지갑에 돈이 있는 친구들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진짜 돈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더라구요.”

워낙 공부를 좋아했던 그는 석사를 법대로 진학하면서 대학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사법시험을 본 것도 사실은 교수로 가르칠 때 변호사 실무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고. 자기말마따나 형편이 여유롭지 않은 ‘시골집 장남’이라면 으레 입신과 출세에 대한 욕망을 품기 마련이다. 자기 능력과 보상을 빨리 교환해 곤궁한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일 터. 그런데 그것은 그 주체를 짓누르는 일종의 중압감이다. 우리는 종종 ‘없는 집안’의 수재들이 종종 중압감을 못 이겨 삶을 그르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들어보니 최 변호사는 자기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앎을 희구하는 즐거움을 향유하면서 그 중압감을 자연스럽게 무화시켰던 것 같다.

“저는 중압감을 그다지 많이 느끼진 않았어요. 오히려 선생님들이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럴수록 제가 좋아하는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진했어요. 성공해서 부모님이 좋은 차를 타시게 하고 좋은 음식을 드시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저라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저는 학문을 하고 싶었어요. 늘 제가 선택하는 걸 믿고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었죠.”

석사를 마친 그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후일 공정거래위원장이 되는 서울대 권오승 교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조언을 듣는다.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법학을 제대로 하려면 박사만 해서는 안 된다. 실무를 경험해 봐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박사과정을 안 받아주겠다는 말씀을 돌려서 하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시험 합격하고 연수원을 나올 즈음 우연히 신문 한 조각을 봤는데, 삼성에서 변호사를 뽑는다는 공채 공고가 났더라구요. 그전까지 삼성은 전관 출신이 아니면 변호사를 뽑지 않았거든요. 우연 같은 일이 거푸 일어난 거죠. 그래서 원래는 헌법재판소를 가고 싶었는데, 삼성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러자 친척들이 ‘아니 판사를 해야지 왜 그런 데를 들어가’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더라구요. 판사가 되고 안 되고가 문제가 아니라 저는 목적이 달랐던 거예요.”

이후 그는 마이크로소프트로 옮겨 공정위와 마이크로소프트 간의 분쟁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대리하게 되고, 송사가 끝난 후 그토록 바라던 경북대 로스쿨 교수로 가게 된다. 그런데 이번 퀄컴 사건에서 여실히 증명된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그의 전문 분야, 지적재산권법, 특히 특허법, 공정거래법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된 걸까.(그는 이 분야의 대표적인 3대 사건이랄 수 있는 공정거래위원회 대 마이크로소프트 사건, 삼성 대 애플 사건, 공정거래위원회 대 퀄컴 사건에 모두 관여한 바 있다.)

“어떤 변호사가 될 것인가가 늘 고민거리였는데, 법조인은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배분을 잘하는, 그러니까 배분적 정의에 기여하는 법조인이 있고, 또 하나는 생산하는 이들을 돕는 법조인이 있다고요. 저는 후자,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처럼 양심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상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지식재산권법이나 특허법이라는 것이 세상에 없던 것을 발명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분야더라구요. 이걸 파고드는 게 내가 살고 싶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에는 또 하나의 필연 같은 우연이 개입한다. 연수원에 있을 당시 미국에 견문을 갈 일이 있었는데, 현지 서점에 갔다가 《Science and Law》 라는 책이 유독 눈에 띄더라는 것이다. 그때 머리를 둔탁하게 때리는 어떤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인터뷰의 계기가 된 퀄컴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할 수 없는데, 그가 공정거래위원회를 대리하게 된 배경에도 학인으로서 그가 성실하게 밟아온 프로세스와 성과물이 매개로 작용했다. 그가 쓴 책을 읽은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이 찾아와서 대리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 그는 퀄컴 측 관계자로부터도 변호인단에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2010년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책을 펴냈어요. 그런데 그 책을 보시고 공정위에 계신 분이 부탁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신기한 게, 아직 퀄컴 사건이 불거지지 않았을 때 표준특허라는 개념으로 논문을 쓰려고 했고 그 사례로 퀄컴을 연구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권오승 교수님도 그렇고 주변에서는 선행논문도 없고, 사건도 아직 없고, 사례도 없으니 논문 주제로는 어렵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있을 때부터 지식재산권이나 특허법, 공정거래법이 분명히 나중에 중요한 이슈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변호사로서 막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퀄컴을 대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공정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까.

“앞의 두 사건 그러니까 공정위 대 마이크로소프트 사건, 삼성 대 애플 사건은 어느 편을 택했다기보다는 사건 자체를 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번 공정위와 퀄컴 소송에서는 제가 대리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인생은 유한한 것인데, 내가 생각하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내면의 명령이 있었어요, 돈이나 이익의 크기가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는. 제가 퀄컴을 대리했으면 ‘원 오브 뎀’이고, 메인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일은 적으면서 수입은 많으니까 사실 나쁠 게 없죠. 그런데 그걸 택하시는 분들도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퀄컴을 택할 수 없었어요. 퀄컴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힘 있는 아이가 힘없는 아이의 팔을 비튼 셈이에요. 1등을 한 학생을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아이가 다른 아이의 책까지 빼앗았다면 나쁜 것이죠.”

자신이 예측하고 준비해온 것들을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만났을 때의 쾌감, 어떤 징후나 조짐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했다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은 얼마나 달콤한가. 아, 내가 맞았구나라는 그 쾌감은. 그런데 그는 여기서도 겸손하다.

“마이크로소프트 대 공정위 때는 마이크로소프트 사내변호사로, 삼성 대 애플 때는 김앤장 변호사로 애플을, 퀄컴과 공정위 때는 공정위 대리인으로 있었는데, 준비를 해도 때가 안 올 수도 있는 건데요, 저에게 그런 계제가 왔다는 건 감사한 일이죠.”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게 있는데, 자기 삶에 치열하다는 것이 어떤 목적에 뜨겁게 육박하는 삶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세속이 권장하는 것들을 삼가고 금욕하면서 내면의 율격을 지키는 것 역시 뜨거움 못지않은 치열함이라는 것이다. 최 교수는 내가 볼 때 자신의 내재율, 그 심장의 박동, 피의 온도와 지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내재율을 존중하며 그것을 따라서 사는 일종의 수행을 실천한 사람인 것.

최 교수가 단독으로 쓴 책 중에 《미국특허법》이라는 게 있는데, 2021년 그 책의 개정판을 내면서 그는 실력 있는 후배들 이름을 저자로 넣었다고 했다. 보통 후배들의 작업 성과에 살짝 이름을 얹는 선배들이 많은데, 최 변호사는 정반대의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은 선행 연구의 성취와 성과를 후배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넘겨주는 것이면서 유한한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일 터이다. 윤리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면서 심지어는 진화생물학적 통찰이 담긴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다음 생에는 가톨릭 사제로 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나는 최 변호사에게서 좀처럼 보기 드문, ‘회의하는 리얼리스트’의 모습을 보았다고 느꼈다. 그는 첨단의 현실 이슈를 미리 예지하고 준비했다는 측면에서 냉엄한 리얼리스트이지만 유한한 삶을 자각하고 숙명에 얽힌 의지의 작용과 반작용, 우연과 필연을 분별하고 성찰한다는 면에서는 범신론적 회의주의자다.

학인으로서 그가 지켜온 기품과 앞을 내다본 자로서의 자부심, 전문성에 대한 자기확신, 그리고 변방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그와 같은 아주 희유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항상 옳거나 이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는 그것까지도 이미 넉넉히 내다본 사람일 거라는 나의 믿음이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시인이 만나는 법] 역대 최대 행정소송을 승리로 이끈 최승재 법무법인 클라스 변호사 (lawtimes.co.kr)